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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2 윤동주
글
윤동주
1917.12.30 ~ 1945.2.16
1917년 12월 30일, 중국 만저우리
1936년 가톨릭소년지 동시 '병아리' 발표
주요작품 〈서시(序詩)〉,〈또 다른 고향〉,〈별 헤는 밤〉
중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숭실중학교과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승실중학교때 처음 시를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은진중학교>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 중학교로 전학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 제15호에 시 공상을 발표,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의학과 진학 희망)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으로 유학, 그해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기숙사와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벗과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과 시를 발표하고 그 해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1940년 일제 경찰의 학생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자 후배 정병욱과 함께 연희전문 기숙사에서 나와 북아현동 누상동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함께 하며 시작에 몰두하였다.
<릿쿄 대학>
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 후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할 무렵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일제의 탄압을 걱정하는 주위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원고를 정병욱에게 증정한 후 일본 대학으로 유학 준비를 하게 된다.
<도시샤대학>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호쿠오카 형무소>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윤동주 장례식>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른 후 간도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향년 27세).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당숙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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